20년 넘게 세계 무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온 여권의 위상이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헨리 여권지수(Henley Passport Index)가 집계한 최신 결과에서 미국 여권이 2014년 부동의 1위에서 12위로 추락하며 말레이시아와 공동 순위를 기록한 것은 단순한 순위 하락을 넘어선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힘’의 논리에서 ‘상호 신뢰와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신뢰’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과거 국제 질서에서 여권의 힘은 그 나라의 경제적, 군사적 역량을 반영하는 척도였다. ‘총과 달러’가 통하는 곳이라면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은 국가 간의 관계를 재정의하고 있으며, 국제 사회는 더 이상 ‘힘이 센 나라’가 아닌 ‘함께할 수 있는 나라’, 즉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를 선호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미국 여권이 180개국에서 통용되지만, 정작 미국이 비자 면제 혜택을 부여한 국가는 46개국에 불과하다는 점은 상호 신뢰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다.
반면, 아시아 국가들은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싱가포르, 한국, 일본은 투명한 행정, 견고한 경제적 신뢰, 글로벌 협약 이행력을 바탕으로 헨리 여권지수 상위권을 휩쓸며 ‘이동성 패권’을 장악했다. 특히 중국은 10년 만에 헨리 여권지수 94위에서 64위로 상승하며 무비자 입국 허용국을 37개국이나 늘리는 등, ‘폐쇄된 대국’이라는 과거의 이미지를 벗고 ‘개방적인 파트너’로서의 면모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국제 사회의 관심이 ‘누가 힘이 센가’에서 ‘누가 신뢰를 구축하고 있는가’로 이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미국의 외향적인 정책 변화, 즉 ‘미국 우선주의’에서 ‘미국 고립주의’로의 경향은 여권 순위 하락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시대 이후 브라질, 베트남,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미국에 대한 비자 면제 조치를 철회한 것은 정치적 고립이 곧바로 이동성의 쇠퇴로 이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제무대에서 ‘문을 닫는 나라’는 결국 ‘닫힌 문 앞에 서게 되는’ 아이러니에 직면할 수 있으며, 여권 순위는 이러한 외교적 흐름을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
이러한 추세는 미국인들조차 ‘제2의 여권’을 모색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고 있다. 올해 미국인의 투자 이민 신청 건수가 전년 대비 67% 증가한 현상은 ‘아메리칸 드림’이 ‘글로벌 드림’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제 국적은 단순히 출생의 결과가 아닌, 글로벌 시대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자산이자 ‘관계의 증명서’가 되고 있다. 헨리 여권지수가 보여주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단순히 여행의 자유를 넘어, 국가 간의 신뢰 관계 구축 능력의 중요성이다. 세계가 더욱 연결되면서도 동시에 분열되는 이 시대에, 진정한 국력은 ‘문을 여는 힘’이며, 미국의 여권이 잃은 것은 비자가 아니라 바로 국가 간 신뢰의 여백이다. 이제 ‘힘의 시대’는 저물고, 여권은 한 국가의 신용등급이자 외교적 신뢰를 나타내는 척도로 자리매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