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대한민국의 산업화 물결 속에서 중화학 공업의 심장부로 우뚝 섰던 울산, 그 중심에 있던 장생포의 역사가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하며 주목받고 있다. 단순한 관광 명소를 넘어, 산업의 흥망성쇠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삶, 그리고 도시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공간으로 변모한 장생포의 이야기는 오늘날 ‘지속 가능한 도시 재생’과 ‘지역 문화의 가치 재발견’이라는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과거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는 깊은 바다와 풍부한 먹거리를 바탕으로 고래잡이와 고래고기 산업이 번성했던 곳이다. 선사시대부터 고래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으며, 조수간만의 차가 적고 플랑크톤이 풍부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고래들의 안식처이자 먹이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은 자연스럽게 포경 산업의 발달로 이어졌고, 장생포는 한때 “개가 만 원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로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역동적인 항구 도시였다. 수출입 선박이 빼곡했으며, 6~7층 규모의 냉동 창고가 즐비했던 과거의 모습은 당시 장생포의 위상을 짐작게 한다. 그러나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금지 결정으로 장생포의 고래 산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남양냉동, 세창냉동 등 냉동 창고들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며 폐허로 남겨졌다.
이러한 폐허의 공간은 지자체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울산 남구청은 2016년 폐허가 된 냉동 창고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2021년 ‘장생포문화창고’를 개관했다. 이곳은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거점이자 시민 누구나 무료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복합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소극장, 녹음실, 연습실뿐만 아니라 특별 전시관, 갤러리, 상설 미디어아트 전시관까지 갖추고 있어 다양한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에어장생’ 체험 프로그램은 어린아이와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며,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 조선 시대 화가들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재해석한 ‘조선의 결, 빛의 화폭에 담기다’ 전시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감성을 일깨우고 있다. 수십 년 된 냉동 창고의 문을 그대로 살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활용한 것은 대표적인 업사이클링 사례로, 폐허를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창의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문화창고의 2층에 자리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은 장생포 문화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한다. 이 전시 공간은 울산 석유화학단지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대한민국의 산업화 과정과 그 이면의 역사, 즉 중금속 중독 질환 ‘온산병’과 같은 아픔까지도 솔직하게 보여준다. 이는 산업 발전의 명암을 동시에 보여주며, 과거의 선택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게 한다.
무엇보다 장생포의 고래고리집에서 맛보는 고래고기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선다. 사라진 산업과 생업, 포경선의 향수를 담아 음미하는 행위는 과거를 애도하고 회상하는 하나의 의례와 같다. 혼획된 밍크고래만을 합법적으로 유통하며, ‘일두백미(한 마리에서 열두 가지 맛)’라 불릴 만큼 다양한 부위와 조리법으로 제공되는 고래고기는 희소성과 더불어 ‘금지된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삶은 수육과 생회가 어우러진 모둠 수육, 쇠고기보다 붉은 살코기, 쫄깃한 ‘우네’와 ‘오배기’ 등 각 부위의 독특한 맛과 식감은 고래고기라는 특별한 식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비록 과거의 산업은 사라졌지만, 고래고기는 여전히 장생포의 식탁 위에 남아 도시의 기억을 이어가고 있다.
장생포의 변화는 과거의 영광만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산업의 흔적을 문화적으로 계승하고 도시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사라진 산업을 단순히 추억 속에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문화적 재생’의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을 만하다. 장생포는 더 이상 고래고기만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사와 그 이면의 삶, 그리고 이를 문화로 승화시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살아 숨 쉬는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동종 업계의 다른 지역들도 지역의 과거 산업 유산을 어떻게 문화적 자산으로 전환하고 도시 재생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을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