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인 여권의 힘을 나타내는 헨리 여권지수(Henley Passport Index)가 2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미국이 최상위 10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이례적인 현상이 발생했다. 2014년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미국 여권의 이번 순위 하락은 단순한 지표 변화를 넘어, 국제 사회의 관계 맺음 방식이 ‘힘’에서 ‘신뢰’로 무게 중심을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변화는 개별 국가의 이동성에 국한되지 않고, 글로벌 산업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과 협력 방식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 국제 사회에서 여권의 힘은 해당 국가의 군사력, 경제력과 같은 ‘하드 파워’를 반영하는 척도로 여겨져 왔다. 강력한 국가는 더 많은 국가로부터 무비자 입국을 허가받으며 국제적인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최근 국제 관계는 ‘함께할 수 있는 능력’, 즉 ‘소프트 파워’와 ‘신뢰’를 기반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는 국제 사회의 규범 준수, 투명한 행정, 글로벌 협약 이행력 등 국가의 평판과 신뢰도가 국가 간 관계 및 협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번 헨리 여권지수 발표는 이러한 거시적인 사회적 요구의 변화가 실제 국가 간의 이동성과 외교적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트렌드 속에서 미국 여권의 순위 하락은 주목할 만한 사례로 분석된다. 2014년 당시 1위를 차지했던 미국 여권은 이제 말레이시아와 함께 공동 12위로 내려앉았으며, 이는 미국이 비자 없이 입국을 허용한 국가가 46개국에 불과하다는 점과 대비된다. 반면, 싱가포르, 한국, 일본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이 상위권을 휩쓸며 ‘이동성 패권’을 장악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한다. 이들 국가의 성공은 탱크나 핵무기가 아닌, 투명한 행정, 경제적 신뢰, 그리고 글로벌 협약을 성실히 이행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신뢰’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번 헨리 여권지수 순위 변동은 동종 업계, 특히 국제 비즈니스 및 외교 관련 분야의 다른 기업 및 국가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미국 우선주의’와 같은 고립주의적 정책이 결국 국가의 국제적 고립과 이동성 쇠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곧 기업들에게도 단순히 규모나 힘에 기반한 경쟁보다는, 파트너 국가 및 기업과의 ‘신뢰’ 구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한다. 복수 시민권 신청의 증가 추세 또한 ‘이동성’이 곧 생존력이며, 국적이 전략적 선택의 자산이 되는 시대로의 전환을 나타낸다. 따라서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가 및 기업 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 형성과 상호 협력이 더욱 강조될 것이며, 이러한 ‘신뢰’는 그 어떤 하드 파워보다 강력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