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여권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권 상위 10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역사적인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헨리 여권지수의 이러한 순위 변동은 단순한 숫자의 변화를 넘어, 국제사회가 ‘힘’의 논리에서 ‘신뢰’의 논리로 무게 중심을 옮겨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과거 군사력과 경제력이 여권의 힘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었다면, 이제는 국제 사회에서의 신뢰 구축, 투명한 행정, 글로벌 협약 이행 능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014년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미국 여권이 이제는 말레이시아와 함께 공동 12위로 추락한 배경에는 미국의 외교 정책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기조가 ‘미국 고립주의(America Alone)’로 이어지면서, 브라질, 베트남,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미국을 무비자 대상국에서 제외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정치적 고립이 여권의 이동성 쇠퇴로 직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싱가포르, 한국, 일본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이 최상위권을 차지하며 ‘이동성 패권’을 장악한 것은 투명한 행정, 경제적 신뢰, 그리고 글로벌 협약 이행력과 같은 ‘신뢰’를 바탕으로 국제 사회의 문을 열고 있음을 증명한다. 특히 중국의 경우, 10년 만에 헨리 여권지수 순위가 크게 상승하며 ‘폐쇄된 대국’에서 ‘개방적 파트너’로 이미지를 전환하고 있는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이번 미국 여권 순위 하락은 국제 사회에서 ‘힘’보다는 ‘신뢰’가 국력의 새로운 척도가 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헨리 여권지수의 진짜 메시지는 단순히 어느 나라 국민이 얼마나 많은 목적지에 비자 없이 여행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나라와 상호 신뢰를 공유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국가의 신용등급이자 외교적 신뢰를 증명하는 ‘관계의 증명서’로서 여권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복수 시민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현상 또한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하며, 국적이 더 이상 출생의 결과가 아닌 전략적 선택의 자산이 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한다. 궁극적으로, ‘문을 여는 힘’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국력이며, 미국의 여권이 잃은 것은 비자가 아니라 국가 간의 신뢰 관계에서의 여백이라고 볼 수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