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 세계적으로 ‘ESG 경영 확산’이라는 거시적 흐름 속에서 문화 콘텐츠 역시 사회적 가치와 포용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글로벌 문화가 로컬의 정서를 성공적으로 전용한 사례로 평가받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의 등장은 한국 문화산업의 지평을 확장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주목받고 있다. <케데헌>은 단순히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한류 현상을 넘어, 문화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콘텐츠 제작 방식과 그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케데헌>은 글로벌 문화가 로컬 콘텐츠를 효과적으로 차용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개방적인 구조를 보여주며, 이는 과거 ‘뮬란’이나 ‘쿵푸팬더’와 같이 글로벌 문화가 로컬 문화를 전용한 사례들과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하지만 <케데헌>은 한국이 직접 제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은 <케데헌>이 북미의 한인 2세 원작자와 제작자들이 다수 참여하여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애플 TV의 2022년작 ‘파친코’를 닮았다고 평가한다. ‘파친코’가 가족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실사 드라마로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배경으로 했다면, <케데헌>은 한국 문화의 고유한 무당 서사와 최신 트렌드인 케이팝을 결합한 애니메이션으로 서울의 상징적인 장소들을 배경으로 한다. 이는 세트 기반의 실사 드라마와 달리, <케데헌>의 서울은 노스탤지어와 호기심을 자극하며 전 세계 시청자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더욱이 <케데헌>의 성공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독특한 매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소니는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캐릭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실감 나게 구현했으며, 제작진은 적극적인 시청자들이 즐길 수 있는 텍스트 전략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일러스트레이션, 그리고 케이팝의 강력한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결합했다. 특히 애니메이션이라는 표현 양식은 탈식민적 세계화의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비서구인의 신체적 이미지를 초월하게 해주었다. 그간 케이팝이 ‘아이돌의 아시아성’이라는 한계에 머물렀던 측면이 있었다면,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장벽을 낮추거나 완전히 제거하여 전 세계 시청자들이 인종주의적 편견 없이 캐릭터를 받아들이고 코스프레 등 다양한 팬 활동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이는 현재 플레이브나 이세계 아이돌과 같은 가상 아이돌 그룹이 해외 투어를 진행할 정도로 발전한 케이팝 문화 속 캐릭터 산업의 현황과도 맥을 같이 한다.
케이팝 문화에서 그룹의 ‘세계관’, 즉 서사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서사는 고만고만해 보이는 그룹들에게 차별화된 정체성을 부여하며, 팬들이 해독해야 할 텍스트를 두껍게 만들어 적극적인 팬 활동을 유도한다. 현재 글로벌 문화 환경에서 가치 지향성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감안할 때, ‘자아 발견 공주 이야기’를 반복해 온 디즈니, ‘개인 성장형 모험 스토리’를 제공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그리고 ‘우주 대전쟁’을 펼치는 DC와 마블 유니버스에 비교했을 때, 인간 세계를 보호하려는 이중 정체성을 가진 주인공과 인간적이고 공동체적인 세계관을 가진 걸그룹 및 보이그룹이 등장하는 <케데헌>의 이야기는 이국적이면서도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케데헌>은 수많은 프리퀄과 시퀄로 확장될 수 있는 서사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동시대적으로도 헌터스들의 세계 투어 중 로컬 귀신들과 싸우는 스토리 라인을 통해 무수히 많은 로컬 버전의 스토리를 창출할 수 있는 개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식적, 서사적 가능성에 더해 <케데헌>은 한국인 디아스포라와 그들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새로운 서사 자원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북미 한인 2세 제작자들의 독특한 한국 문화 경험과 애정은 글로벌 시장과의 효과적인 ‘문화적 중재’를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이 만들어낸 광범위한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통해 세계사를 한국인의 경험으로 포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케데헌>은 단순히 한류 현상을 넘어, 한류가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문을 열고 있으며, 한국의 미래와 한인 디아스포라의 연결 가능성을 탐구할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홍석경 센터장은 한류 연구자로서 팬덤 온라인 참여 관찰부터 데이터 분석까지 다양한 연구 방법을 섭렵했으며, 스스로를 세상 속 의미 생산을 묻는 기호학자로 이해한다. 그는 ‘세계화와 디지털 문화 시대의 한류’, ‘드라마의 모든 것’, ‘BTS 길 위에서’ 등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넷플릭스의 영향, 한국 문화 산업, 한류 현상의 이론화를 위해 국제적 연구자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다년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