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발전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ESG 경영의 확산은 단순히 기업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으로까지 그 범위를 넓히고 있다. 특히,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반구천 암각화’는 선사 시대 인류의 예술성과 창의성을 증명하는 독보적인 유적으로, 단순한 과거의 유물을 넘어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문화유산의 중요성과 함께 이를 어떻게 미래 세대에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한다.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은 1970년 12월 24일 울산 언양에서 우연히 마주친 ‘천전리 암각화’와 이듬해인 1971년 12월 25일 인근 대곡리에서 발견된 ‘대곡리 암각화’를 통해 우리나라 선사 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음을 회고한다. 이 두 암각화는 현재 ‘반구천 암각화’로 통칭되며,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공식 등재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천전리 암각화와 신석기 시대의 대곡리 암각화는 각각 6000년에 이르는 인간의 상상력, 예술성,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바위 위에 새겨 넣은 ‘역사의 벽화’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를 “선사 시대부터 6000여 년에 걸쳐 지속된 암각화의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인 증거”이자 “탁월한 관찰력으로 그려진 사실적인 그림과 독특한 구도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하며, ‘사실성’, ‘예술성’, ‘창의성’을 핵심 키워드로 제시했다. 이는 2010년 잠정목록에 오른 지 15년 만에 이룬 성과다.
천전리 유적에는 높이 약 2.7ｍ, 너비 10ｍ 바위에 마름모, 원형 등 620여 점의 청동기 시대 추정 추상적 문양과 신라 시대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한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는 새끼 고래를 이끄는 무리, 작살에 맞아 배로 끌려가는 고래의 모습, 그리고 호랑이·사슴 같은 육지동물과 풍요를 기원하던 제의의 흔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처럼 1년 사이 크리스마스 전후로 발견된 두 암각화는 고미술학계에서 ‘크리스마스의 기적’ 또는 ‘크리스마스의 선물’이라 불릴 정도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필자는 1987년 MBC 다큐멘터리 제작 당시 문명대 교수 연구팀과 함께 현장을 방문하여, 해 질 녘 햇살에 비친 50여 마리의 고래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는 단순한 동물의 묘사를 넘어 집단의례의 도상, 인류 예술의 기원, 그리고 현대 다큐멘터리의 스토리보드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6000여 년 전 동해 연안 거주민들이 집단으로 고래를 사냥하고 그 경험을 바위에 새겨 넣은 공동체 삶의 기록이자 하늘로 띄운 기도였다.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비견될 만한 인류 선사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또한, 천전리 암각화의 기하문과 다섯 개 다이아몬드 형상은 해석되지 않은 미지의 코드를 품고 있으며, 이는 2022년 울산MBC 3부작 다큐멘터리로도 탐구된 바 있다. 문화유산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시간의 언어’인 셈이다.
반구천 암각화는 지난 반세기 동안 수몰 위협과 싸워왔다. 댐 수위에 잠겨 박락이 떨어져 나가고, 탁본으로 인해 원본이 상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최근 가뭄으로 암각화가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기후변화와 댐 운영 변수는 언제든 ‘반구천’을 ‘반수천(半水川)’으로 되돌릴 수 있으며, 물속에 잠긴 유산은 세계유산으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 유네스코는 등재 이후의 보호·관리 계획이 부실할 경우 등재를 철회할 수도 있기에, ‘기적의 현장’을 ‘수몰의 현장’으로 되돌리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진정한 과제는 이제부터다. 울산시는 ‘고래의 도시’를 표방하며 고래 축제 개최 등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암각화를 단순 보존하는 것을 넘어, 체험형 테마공원, 탐방로, 교육 프로그램, 워케이션 공간을 포함하는 생동감 있는 문화 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 또한, 유네스코 등재를 계기로 AI 기반 스마트 유산 관리 시스템, 암각화 세계센터 건립 등 미래형 전략도 병행 추진될 예정이다. 하지만 관광 인프라라는 명분 아래 생태 환경이 훼손되거나 과잉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유산의 본질을 배반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와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보존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선사 시대의 시스티나 성당’이라 불리는 라스코 동굴은 1963년 일반 공개 이후 발생한 환경 문제로 진본 동굴을 폐쇄하고 재현 동굴과 디지털 복제본을 선보이고 있다. 알타미라 동굴 역시 20세기 중반 이후 관광객 급증으로 인한 훼손으로 2002년 전면 폐쇄 후 정밀 복제 동굴을 통해 교육 및 관광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 사례는 문화유산의 공개와 보존 간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며, 원본이 주는 ‘아우라’가 최상일지라도 후대에 온전히 물려주기 위한 책임감으로 인해 복제품을 통한 ‘간접 관람’ 방식으로 전환해야 했다. 현대 기술인 3D 스캔, 디지털 프린트, AI 제어 등을 활용하여 원본의 가치를 최대한 보존하면서도 미래 세대가 향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유산은 그 자체로 우리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강력한 장치다. 반구천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의 꿈은 유네스코라는 이름으로 다시 살아났다. 이제 이 거대한 바위 위에 새겨진 장엄한 서사는, 인류와 함께 나누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