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개인의 이동성과 국가 간 상호 작용에 대한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가운데, 헨리 여권지수(Henley Passport Index)의 최근 발표는 글로벌 역학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사한다. 헨리 여권지수가 만들어진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한때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했던 미국 여권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권 상위 10위권에서 밀려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이는 단순한 순위 변동을 넘어, 개방성과 협력을 중시하는 국가들이 이동성 측면에서 앞서나가고, 과거의 특권에 안주하는 국가들이 뒤처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2014년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미국 여권은 이제 말레이시아와 함께 공동 12위로 추락했다. 현재 미국 여권 소지자는 180개 목적지에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지만, 미국이 자국 입국을 비자 없이 허용하는 국가는 단 46개국에 불과하다. 이러한 ‘입국 허용 변화’는 여러 요인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지난 4월 브라질이 미국 시민의 비자 면제를 철회한 데 이어, 중국이 급속히 확대되는 무비자 입국 대상국 명단에서 미국을 제외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파푸아뉴기니와 미얀마의 입국 정책 조정, 그리고 소말리아의 새로운 전자비자(eVisa) 시스템 도입과 베트남의 미국을 최신 무비자 입국 확대 대상에서 제외한 결정은 미국 여권의 위상을 더욱 떨어뜨렸다. 헨리앤파트너스의 크리스티안 H. 케일린 회장은 이러한 현상을 “글로벌 이동성과 소프트파워의 역학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진단하며, “개방성과 협력을 수용하는 국가들은 앞서 나가고 있지만, 과거의 특권에 안주하는 국가들은 뒤처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미국 여권의 하락세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중국의 약진이다. 지난 10년간 헨리 여권지수에서 가장 큰 상승세를 보인 국가 중 하나로 꼽히는 중국은 2015년 94위에서 2025년 현재 64위로 올라섰으며,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목적지가 37곳 증가했다. 헨리 오픈니스 지수에서도 중국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현재 65위에 올라 있으며 76개국에 입국을 허용하고 있다. 이는 미국보다 30개국이 더 많은 수치이다. 최근 러시아에 대한 무비자 입국 허용을 포함한 일련의 조치는 중국이 추진하는 ‘개방 확대 전략’을 명확히 보여준다. 걸프 지역 국가, 남미, 그리고 여러 유럽 국가들과의 신규 협정을 통해 중국은 세계 이동성의 강자로 자리매김하며, 여행 자유도 측면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배적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함의에 대해 그랜트손턴 차이나의 파트너인 팀 클랫 박사는 “트럼프의 재집권은 미국의 이동성을 약화시키는 새로운 무역 갈등을 초래했지만, 중국의 전략적 개방은 자국의 글로벌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경로는 향후 전 세계의 경제 및 여행 질서를 재편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또한, 미국 여권의 위상 하락은 전례 없는 ‘대체 거주권 및 시민권’ 수요 급증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국제적인 이주 및 투자 흐름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