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의 ‘반구천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며 이러한 흐름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개별 유적의 등재를 넘어,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인류의 예술적 상상력과 자연과의 교감을 담은 ‘역사의 벽화’로서 그 위상을 인정받은 결과다. 반구천 암각화의 이번 등재는 인류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번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는 ‘반구천 암각화’가 지닌 선사 시대부터 6000여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암각화 전통의 독보적인 증거임을 명확히 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탁월한 관찰력으로 그려진 사실적인 그림과 독특한 구도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성을 보여준다”며, 이를 “선사인의 창의성으로 풀어낸 걸작”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곧 반구천 암각화가 지닌 ‘사실성, 예술성, 창의성’이라는 핵심 가치를 제대로 포착한 것으로, 2010년 잠정목록 등재 이후 15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결과다.
울산 반구천 암각화는 크게 천전리 암각화와 대곡리 암각화로 나뉜다. 천전리 유적에는 높이 약 2.7m, 너비 10m 바위 면을 따라 각종 도형과 글, 그림 등 620여 점이 새겨져 있으며, 청동기 시대에 새겨진 추상적인 문양과 신라 시대의 명문이 함께 발견된다. 반면, 1971년 12월 25일 발견된 대곡리 암각화는 고래,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 다양한 동물과 사냥 장면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6000여 년 전 동해 연안 거주민들의 집단 고래 사냥 모습과 풍요를 기원하던 제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 두 유적은 발견 시기는 달랐으나, 각각 청동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나란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문명대 교수가 1970년 12월 24일 천전리 암각화를 처음 발견한 날과 1년 뒤 대곡리 암각화가 발견된 날 모두 크리스마스 전후라는 점에서 ‘크리스마스의 기적’ 혹은 ‘선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반구천 암각화는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해야 할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수몰 위협과 싸워왔으며, 댐 수위에 잠겨 박락이 떨어져 나가거나 탁본으로 원본이 상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최근 가뭄으로 암각화가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기후변화와 댐 운영의 변수 앞에서 ‘반수천(半水川)’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있다. 물속에 잠긴 유산은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잃을 수 있으며, 등재 이후의 관리 계획이 부실할 경우 유네스코는 등재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따라 반구천 암각화의 미래를 위한 과제는 지금부터가 본격적이다. 울산시는 ‘고래의 도시’를 표방하며 고래 축제 개최 등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으며, 암각화를 단순히 보존하는 것을 넘어 체험형 테마공원, 탐방로, 교육 프로그램, 워케이션 공간 등을 아우르는 생동하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 이번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AI 기반의 스마트 유산관리 시스템, 암각화 세계센터 건립 등 미래형 전략 또한 병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관광 인프라 조성이라는 명분 아래 생태 환경 훼손이나 과잉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유산의 본질을 배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와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라스코 동굴은 관람객 증가로 인한 환경 변화 문제로 1963년 진본 동굴을 폐쇄하고 재현 동굴을 설치했으며, 알타미라 동굴 역시 2002년 전면 폐쇄 후 정밀한 복제 동굴인 ‘새 동굴’을 운영 중이다. 이들 역시 동굴벽화의 애로로 인해 결국 복제품을 통한 ‘간접 관람’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비록 원본이 주는 ‘아우라’는 최상이지만, 후대에 온전히 물려주어야 할 책임감을 고려할 때, 현대 기술을 활용한 3D 스캔, 디지털 프린트, AI 제어 등을 통해 원본의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대중에게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반구천 암각화는 단순한 선사 시대의 유물을 넘어, 우리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장치이자 인류와 함께 나누는 이야기로 승화되어야 할 거대한 바위의 서사다. 유네스코 등재를 통해 다시 살아난 ‘고래의 꿈’이 지속 가능한 보존과 창의적인 활용을 통해 미래 세대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