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계에서 ‘ESG 경영’이라는 거시적인 트렌드가 확산되는 가운데, 과거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미래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한국페스티발앙상블이 제80회 정기연주회를 통해 프랑스 음악사의 두 거장, 비제와 라벨을 조명하는 특별한 무대를 마련했다. 이번 공연은 단순한 기념을 넘어, 19세기 낭만주의와 20세기 인상주의라는 상이한 시대를 잇는 음악적 교차점을 탐색하며 한국 실내악의 역사와 발전을 가늠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실천 사례로 평가된다.

프랑스 음악사에 있어 1875년은 지울 수 없는 상징성을 지닌다. 위대한 오페라 <카르멘>을 남긴 조르주 비제(1838-1875)가 서른여섯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한 해이자, 빛과 색채의 섬세한 음향으로 20세기 인상주의 음악의 지평을 연 모리스 라벨(1875-1937)이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 비제의 죽음과 라벨의 탄생은 마치 ‘종막과 서막’처럼 한 시대를 잇는 극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프랑스 음악의 흐름을 과거와 미래로 나누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사)한국페스티발앙상블은 창단 80주년을 맞아 이러한 역사적인 교차점을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재현하고자 한다. 박은희 대표는 “두 작곡가의 의미 깊은 인연을 그들의 주요 작품을 통해 시대적 흐름의 변천과 특징을 살피는 기회로 마련해보았다”며 이번 공연의 취지를 밝혔다.

공연은 라벨의 ‘서주와 알레그로(Introduction and Allegro, 1905)’로 문을 연다. 이 작품은 기악적 색채 실험과 치밀한 구성을 통해 프랑스 실내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라벨의 초기작으로, 하프와 관악기, 현악기가 어우러져 화려한 하프의 기교와 다채로운 음색을 선보인다. 이어 비제의 ‘아를의 여인 모음곡 2번 중 미뉴엣(Menuet from L’Arlésienne Suite No.2, 1872)’은 민속 선율과 드라마틱한 긴장감이 공존하는 목가적 서정성을 통해 19세기 프랑스 음악의 매력을 선사한다. 공연은 라벨의 ‘마다가스카르의 노래(Chansons Madécasses, 1925–1926)’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텍스트의 사회적 맥락과 독특한 음향 실험이 결합된 라벨 후기 성악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며, 1부의 대미를 장식한다.

2부에서는 비제의 ‘카르멘 판타지 (Carmen Fantasy for Two Pianos, arr. Greg Anderson)’가 미국 피아니스트 겸 편곡자 그레그 앤더슨의 편곡으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해 새롭게 선보인다. 피아니스트들의 극적인 연주는 강렬했던 오페라 무대를 생생하게 재현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마지막 곡으로는 라벨의 ‘현악 4중주 F장조(String Quartet in F major, 1903)’가 연주된다. 청년 시절 완성된 이 유일한 현악 사중주는 프랑스 실내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19세기 낭만주의와 20세기 인상주의가 만나는 경계선에서 펼쳐지는 섬세한 음악적 여정을 완성한다.

(사)한국페스티발앙상블은 1986년 창단 이후 꾸준히 다양한 정기연주회, 현대음악축제, 신작 공연 등을 개최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실내악 전문 연주 단체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이번 제80회 정기연주회는 비제의 불꽃 같은 낭만성과 선율미, 그리고 라벨의 섬세한 색채와 현대적 감수성을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단순한 클래식 공연을 넘어, 프랑스 음악사의 중요한 흐름을 재해석하고 한국 음악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중요한 발걸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동종 업계의 다른 단체들에게도 영감을 주며,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저변 확대와 예술적 깊이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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