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변화를 융합하며 지역 문화 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움직임이 주목받고 있다. 특히 산업화 시대의 상징이었던 특정 자원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되면서, 이는 단순한 추억 되새김을 넘어 지역 경제 활성화와 문화적 자긍심 고취라는 다층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울산광역시 장생포의 ‘고래’를 둘러싼 이야기는 과거 산업의 흔적을 현재의 문화 콘텐츠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킨 흥미로운 사례로 떠오르고 있다.
장생포는 과거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하며 풍부한 해양 자원 덕분에 선사시대부터 고래의 보금자리였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반구대암각화의 고래잡이 그림과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래 관련 유물들은 이곳이 고래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음을 증명한다. 동해 중에서도 수심이 깊으면서 조수차가 적었던 장생포의 지리적 이점은 염전 조성과 해조류 성장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태화강, 삼호강, 회야강 등에서 유입되는 부유물과 플랑크톤 덕분에 작은 물고기들이 풍부하게 서식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는 새끼를 낳으려는 고래들에게 더없이 좋은 서식지가 되었고, ‘귀신고래’를 비롯한 다양한 고래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은 장생포를 포경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했으며, 어업 성행으로 인해 ‘개가 만 원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역 경제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수출입 선박과 대형 냉동창고가 즐비했던 장생포의 모습은 당시 산업의 역동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금지 결정으로 인해 장생포의 고래 산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73년 남양냉동, 1993년 세창냉동 등으로 운영되었던 냉동창고들 역시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며 과거의 영화는 점차 빛을 바랬다. 그러나 폐허가 된 냉동창고는 지자체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울산 남구청은 2016년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고 주민 의견을 수렴하여 2021년 ‘장생포문화창고’를 개관했다. 이곳은 단순한 문화 공간을 넘어, 과거 산업의 상징이었던 냉동창고를 업사이클링하여 현대적인 복합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모범적인 사례다. 총 6층 규모의 장생포문화창고는 소극장, 녹음실, 연습실을 갖춰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거점 역할을 하며, 특별전시관, 갤러리, 상설 미디어아트 전시관 등 다채로운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특히 어린이를 위한 ‘에어장생’ 항공 체험, 조선 시대를 재해석한 미디어 아트 전시,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갤러리 등은 세대를 아우르는 매력적인 콘텐츠를 선보인다.
이 가운데에서도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은 장생포의 또 다른 역사적 맥락을 조명하며 깊은 울림을 준다.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심장부였던 울산석유화학단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이 공간은, 1980년대 온산국가산업단지 조성 과정에서 발생했던 ‘온산병’과 같은 중금속 중독 질환의 아픔까지도 솔직하게 담아내며 과거의 과오와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의 장생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비록 상업 포경은 금지되었지만, 장생포는 여전히 ‘고래고기는 장생포에서 먹어야 제맛’이라는 인식을 유지하며 고래 음식 문화의 명맥을 잇고 있다. 현재 유통되는 고래고기는 대부분 혼획된 밍크고래 등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공급되지만, 높은 가격으로 인해 희소성과 금지의 역설이 고래고기를 더욱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일두백미(한 마리에서 백 가지 맛이 난다)’라는 말처럼, 살코기, 껍질, 혀, 염통 등 다양한 부위에서 느껴지는 풍부한 맛과 질감은 ‘우네’나 ‘오배기’와 같은 고급 부위로 이어지며 미식 경험을 풍성하게 한다. 특히 과거 비린 맛에 대한 부정적 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신선하고 다채로운 조리법으로 재해석된 고래고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는 ‘애도와 향수의 정서’가 담긴 고래 요리가 단순한 식사를 넘어 과거를 회상하는 의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생포의 고래요릿집은 단순히 음식을 파는 공간을 넘어, 사라진 산업과 생업, 포경선의 향수를 고기 한 점에 담아 음미하는 ‘애도와 향수의 정서’를 담고 있다. 과거 고래로 꿈을 키웠던 어부들, 고래 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했던 피난민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 역군들을 기리는 문화적 지층이 장생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장생포의 고래는 사라졌지만, 고래고기는 남아 우리가 고래의 시간, 도시의 기억, 그리고 공동체의 내일을 함께 씹고 삼키며 미래를 준비하게 한다. 이러한 장생포의 사례는 과거 산업의 유산을 현대 문화 콘텐츠로 성공적으로 전환하고, 지역의 정체성을 강화하며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모범적인 모델로서 업계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