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가운데, 한국과 아세안(ASEAN)이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CSP: 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 격상을 통해 미래 협력 동반자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는 단순한 관계 개선을 넘어, 인도태평양 시대를 맞아 양측이 공동 번영을 추구하며 글로벌 도전 과제에 함께 대응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세계 경제 질서의 변화와 함께 아세안이 한국의 외교·안보 및 경제적 이익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는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난 10월 10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아세안 10개국 정상들은 양측 관계를 CSP로 격상하기로 합의하며 35년간 이어져 온 협력의 질적 도약을 이루었다. 1989년 부분 대화상대국으로 시작된 한-아세안 관계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경제, 투자, 인적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해왔다. 그러나 싱가포르 정부 산하 동남아시아연구소(ISEAS)의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나듯, 아세안 내에서 한국의 전략적 영향력은 여전히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CSP 격상은 한-아세안 관계를 더욱 포괄적이고 획기적인 단계로 이끌어 줄 촉진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세안은 한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협력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남중국해를 비롯한 해양 동남아시아 지역은 항행의 자유와 안정된 해양 질서 유지라는 한국의 핵심 이익과 직결되어 있으며, 핵심 광물 공급망 안정화 및 경제안보 협력 강화에도 필수적인 지역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한국은 아세안 중시 외교를 이어왔다”며 “한국과 아세안은 이제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함께 써 나갈 것”이라고 강조하며, “공동 번영을 위한 파트너로서 앞으로 전방위적이고 포괄적 협력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구체화된 협력 방안들은 주목할 만하다. 우선, 국방 및 경제안보 분야에서의 협력이 한층 강화된다. 오는 11월에는 첫 국방장관 대면 회의가 개최될 예정이며, 2025년에는 ‘한-아세안 경제·통상 싱크탱크 다이얼로그’ 개최를 추진하여 경제안보 및 통상 협력을 더욱 확대한다. 또한, 향후 5년간 아세안 출신 학생 4만 명에 대한 연수를 추진하여 인적 교류를 확대하고 미래 세대 간 우호 협력을 증진할 계획이다.
더불어,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8·15 통일 독트린’의 중요성을 소개하며 아세안 국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는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국제사회 공조를 강화하고, 한반도의 평화가 아세안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며 지역 간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한·일·중과 아세안 간의 선순환 협력을 제안하며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로운 협력 모델을 제시했다. 이는 한국이 아세안과의 관계를 CSP로 격상함과 동시에 아세안+3 간의 선순환 협력을 주도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번 CSP 격상은 한국 외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세안 지역은 한국의 글로벌 중추 국가 외교를 구현하는 데 중요한 협력 지역이며, CSP 격상은 이를 이행하기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또한, 아세안이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 여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호혜적이고 이익 균등적인 협력 대상 지역임을 감안할 때, CSP 격상은 이러한 관계의 중요성을 잘 반영했다. 아세안은 한국의 주요 시장이자 교역 파트너일 뿐만 아니라, 중요 해상 교통로를 제공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등 경제·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현 정부의 ‘한-아세안 연대구상(KASI)’ 발표를 통해 해양 안보, 사이버 안보, 아세안 방위 역량 강화 협력 등 포괄 안보 협력 확대를 강조하며, 아세안과의 실질적인 ‘포괄적’ 전략 협력을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이번 관계 격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한-아세안 관계는 경제 및 사회·문화 협력은 많이 발전했으나, 안보 협력이나 아세안 지역 정세에 대한 한국의 적극적 관여 측면에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한국과 아세안이 평화, 번영, 상생을 위한 미래 동반자로서 새로운 35년을 함께 일궈 나가기를 기대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메시지처럼, 앞으로 한-아세안 관계의 격상에 대한 아세안의 기대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한-아세안 협력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으며, 긍정적인 모멘텀을 이어가고 미래 동반자로서 새로운 35년을 만들어 가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