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대응이 단순한 환경 이슈를 넘어 통상 정책과 기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기후 대응 정책과 통상 정책을 연계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이제 기업들은 제품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탄소감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시점에 직면했다. 이는 전기차, 철강 등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제품 및 소재로 그 영향 범위가 확대될 전망이다.
국제사회가 공동 규범 아래 기후변화 대응 속도를 조절해왔던 지난 30년간의 느슨한 협력 기조는 기후위기 심화와 미·중 갈등, 러·우 전쟁 등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보호무역주의 흐름과 맞물려 기후변화 규범의 파편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미국과 EU는 기후대응과 통상정책을 연계하는 정책 도입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2024년부터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본격적인 시행,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보고의무 시행 등 기후-통상 연계 이행 결과가 가시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변화는 수출 제품의 원산지 증명 기준에 탄소배출량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추가됨을 의미하며, 프랑스의 전기차 보조금 개편안처럼 생산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량이 적을수록 보조금 혜택이 커지는 등 기업의 가격 경쟁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기업의 상대적 탈탄소 속도가 수출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이다.
기후-통상 연계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은 ‘기후기술 확보’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초불확실성 속에서도 에너지 전환 투자 전략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집중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22년 설문 조사에서는 42%의 투자회사 및 에너지기업 고위경영자들이 향후 18개월 내 탈탄소/저탄소 기술에 투자할 것이라고 응답했으며, 2023년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90%가 에너지 전환 전략에 대한 투자를 유지하거나 더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추세는 기술 가격 하락과 보급 확산의 선순환, IRA 및 EU 탄소중립산업법(NZIA) 등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정책 확산, 그리고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려는 기업들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세계 최초로 메탄올 추진 초대형 컨테이너선 발주에 나선 AP몰러-머스크의 사례는 친환경 해운 시장 선점을 위한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를 보여준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탄소중립 동인들이 한국의 특수한 여건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다른 국가와 연결되지 않은 고립된 전력망, 비개방적인 전력 시장, 제한적인 자연자원 등으로 인해 글로벌 기술 가격 하락 효과가 충분히 체감되지 않고 있으며, 산업 정책의 확산 측면에서도 수출 지장 최소화를 위한 방어적 대응에 집중하여 탄소중립 투자 활성화로의 연계에 둔감한 상황이다. ‘first mover’보다는 ‘fast follower’에 익숙한 한국 기업들에게는 시장 선점을 위한 투자가 다소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기업들은 단기 감축 규제 및 기술 지원에 대한 정책 시그널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기후기술 확보를 위한 투자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 지원이 필요하다. 전체 기술 정보의 80%를 설명할 수 있는 특허 빅데이터 분석을 활용하여 유망 분야 선정, 핵심 기술 파악, 접목 기술 색인, 기술 벤치마킹, M&A 타겟팅, 기술 가치 평가 등에 객관적인 데이터를 활용한다면, 기후 기술 확보를 위한 전략 수립 및 투자 의사결정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아직 시장에 출시되지 않았거나 시장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기술이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필요한 기술의 35%에 달한다는 점은, 재생에너지, 전기화, 에너지 효율, 수소, 탄소 제거 등 다양한 기후 기술 분야에서 여전히 시장 선점의 기회가 열려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3년 12월 개최된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의 결과는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를 촉발하고, 결과적으로 기업에 대한 기후변화 대응 요구를 더욱 증대시킬 것이다. COP28 결정문에 따라 한국 정부는 2030년 국가 감축 목표 달성 경과를 포함한 격년 투명성 보고서를 2024년까지 제출하고, 2025년까지 더 야심 찬 2035년 국가 감축 목표를 유엔에 제출해야 한다. 이를 이행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2024년 내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확정하고, 제4차 배출권거래제 계획기간의 기본계획 및 할당계획을 준비해야 한다. 이러한 국가 법정 계획들은 COP28 결정문 및 국가 감축 목표와의 정합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은 기후-통상 연계 가시화, 기후기술 경쟁 가속화, 한국의 특수성, 그리고 COP28 결과에 따른 국내외 후속 조치들을 면밀히 모니터링하며 전략을 지속적으로 갱신해야 한다. 나아가 국내외 정책 및 전략 형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이해관계자와의 소통을 강화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