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경영 활동이 더 이상 국경 내에 머무르지 않는다. 미중 갈등, 공급망 재편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수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기업이 직접 국제 질서 형성에 참여하는 ‘민간 외교’가 새로운 경영 전략으로 부상한다. 최태원 SK 회장이 워싱턴 D.C.에서 주최한 ‘트랜스 퍼시픽 다이얼로그(TPD)’는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는 단순한 국제 교류 행사가 아니라, 복합 위기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한 SK의 정교한 생존 전략이다. 과거 기업들은 정부가 정한 국제 통상 규칙에 수동적으로 적응했다. 그러나 이제 반도체, 배터리, AI 등 첨단 산업의 패권이 국가 안보와 직결되면서, 기업이 직접 정책 형성 과정에 참여하고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최 회장이 환영사에서 언급한 ‘단순한 도전이 아닌 변화’는 바로 이러한 지정학과 경제가 융합된 새로운 경영 환경을 의미한다. TPD는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과 소통하며 규제 리스크를 관리하고, 글로벌 파트너십을 구축해 안정적인 사업 환경을 확보하려는 선제적 대응이다.

이러한 민간 외교의 중심에는 ESG가 있다. 기후변화 대응(E), 인권 중심의 공급망 관리(S), 투명한 지배구조(G)는 이제 개별 기업의 CSR 활동을 넘어 새로운 국제 무역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나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ESG가 어떻게 기업의 비용과 기회를 좌우하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SK의 TPD와 같은 행보는 ESG를 고리로 동맹을 구축하고, 다가올 규제 환경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전략적 포석이다. 앞으로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은 기술력이나 자본력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파도를 넘고 ESG 의제를 주도하는 ‘외교적 역량’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