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의 ESG 전략을 분석할 때 비재무적 요소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정(情)’ 문화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유대를 넘어 기업과 이해관계자 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비공식적 규범으로 작동한다. 과거 농경사회의 품앗이와 두레에서 비롯된 이 문화는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지역사회와의 끈끈한 관계 맺기에 집중되는 배경이 됐다. 기업이 지역 사회의 대소사를 챙기고, 협력사를 ‘가족’처럼 여기는 경영 방식은 정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접근은 강력한 사회적 자본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직원들의 높은 조직 충성도, 협력사와의 장기적 신뢰 관계, 지역사회의 우호적 평판은 단기적 재무 성과로 측정하기 어려운 무형자산이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지역사회와 임직원의 결속력은 기업의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는 서구식 계약 기반의 주주자본주의 모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형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글로벌 ESG 패러다임이 확산되면서 정 문화에 기반한 비정형적 CSR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공급망실사지침(CSDDD) 등은 협력사의 인권, 환경 문제에 대해 정성적 관계가 아닌 체계적인 데이터와 검증 가능한 시스템을 요구한다. ‘우리가 남이가’ 식의 접근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협력사 선정 및 평가를 저해하는 거버넌스 리스크로 지적될 수 있다. 또한 사생활 존중과 개인주의 가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가족 같은 회사’를 내세우는 문화는 때로 과도한 개입이나 비합리적 의사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결국 한국 기업은 정 문화를 전략적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공동체적 유대감과 상호 돌봄이라는 긍정적 가치는 계승하되, 이를 투명하고 측정 가능한 사회적 책임(S) 지표로 전환하는 노력이 시급하다. 예를 들어, 지역사회 기여 활동을 단순한 시혜적 지원에서 벗어나 지역의 필요를 분석하고 사회적 임팩트를 측정하는 모델로 발전시켜야 한다. 협력사와의 관계 역시 정서적 유대를 넘어 공정한 계약과 상생을 위한 객관적 지표로 관리하는 시스템 구축이 요구된다. 정 문화를 현대적 ESG 경영의 틀 안에서 어떻게 체계화하느냐가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