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 발전의 가속화는 고성능 반도체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며 글로벌 산업 지형을 재편하고 있다. 특히 AI 기술의 핵심 동력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분야에서 K-반도체의 위상이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이는 단순한 개별 기업의 성장을 넘어, 한국 반도체 산업 전반에 걸쳐 장기적인 호황, 즉 ‘슈퍼사이클’을 견인할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최근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AI 반도체 분야의 ‘장기 파트너’로 명확히 지목하며 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기존에는 엔비디아가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HBM 제품을 주로 사용하고 삼성전자의 참여는 제한적이었으나, 이제는 삼성전자 또한 HBM4, HBM5, HBM6, 나아가 HBM97까지 협력할 수 있는 중요한 파트너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는 AI 수요의 급증으로 HBM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면서, 세계 최대 메모리 제조 업체인 삼성전자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최신 AI 가속기 ‘블랙웰’ 시리즈에 HBM3E를 납품하기 시작했으며, 경쟁사보다 앞선 최신 D램(1c) 기술을 바탕으로 차세대 제품인 HBM4 준비까지 마쳤다.

더 나아가, 이번 협력은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젠슨 황 CEO는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의 로보틱스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전량 생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AP는 엔비디아의 임베디드 시스템 플랫폼 ‘젯슨’을 구성하며, 로봇을 포함한 물리적 AI(피지컬 AI)에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엔비디아가 미래 핵심 사업으로 추진하는 피지컬 AI 사업의 공급망에 삼성전자가 본격적으로 합류했음을 의미하며, 삼성전자는 테슬라, 애플에 이어 또 다른 대형 파운드리 고객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긍정적인 전망은 이미 실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3분기에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으며, 엔비디아와의 긴밀한 협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슈퍼사이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다. SK하이닉스는 현재의 슈퍼사이클이 2017~2018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며 최소 2년에서 최대 5년까지 장기화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 전략마케팅실장(부사장) 역시 AI 서버 수요가 업계 전체 공급량을 초과하고 있으며, 내년 생산 능력 확대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이를 웃돌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AI가 촉발한 이번 슈퍼사이클은 특정 반도체 품목에 국한되지 않고 D램, HBM, 낸드플래시 메모리 등 시스템 구성에 필요한 전반적인 메모리 반도체 수요를 견인하고 있다. 김기태 SK하이닉스 HBM세일즈마케팅담당(부사장)은 HBM 수요가 2027년에도 타이트한 수급을 유지하며 향후 5년간 연평균 3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 투자은행 노무라증권은 이러한 전망을 바탕으로 SK하이닉스가 2027년 영업이익 면에서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를 넘어설 것이라는 파격적인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예측들은 K-반도체가 AI 시대를 맞아 장기적인 호황을 누릴 수 있는 충분한 가시성을 확보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