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300억 원 규모의 전기차 중속 충전시설 구축 보조금 사업에 블록체인 기반 예금토큰 지급 방식을 도입한다. 이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연계된 디지털 지급수단을 국가사업에 적용하는 세계 최초의 사례로, 단순한 결제 수단 혁신을 넘어 국가 재정 집행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신호탄으로 분석된다. 이번 시범사업은 기후에너지환경부, 재정경제부, 한국은행이 협력하여 추진한다.

이번 결정의 핵심은 재정 집행의 투명성 확보다. 기존 국고보조금은 지급 후 사용 내역을 사후 정산하는 방식으로 운영돼 부정수급이나 목적 외 사용의 위험에 노출되어 왔다. 그러나 예금토큰은 스마트 컨트랙트 기술을 통해 자금의 용도와 사용처를 사전에 지정하고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다. 지정된 목적 외에는 결제가 원천적으로 차단되므로, 보조금이 충전기 구매, 설치 공사 등 정해진 용도로만 사용되도록 강제하는 효과가 있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 사업이 첫 시범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결과다. 전기차 보급은 정부의 핵심 탈탄소 정책으로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분야이며, 다수의 민간 사업자가 참여해 보조금 집행의 복잡성이 높다. 성장하는 산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정 누수를 초기에 차단하고, 기술의 효용성을 검증하기에 최적의 테스트베드인 셈이다. 한국환경공단이 보조사업자로서 오는 6월 사업자를 선정하고 예금토큰으로 보조금을 집행할 예정이다.

이번 시도는 한국은행이 추진해 온 디지털화폐 생태계 구축의 실증 단계이기도 하다. 중앙은행이 기관용 디지털화폐를 발행하면, 시중은행은 이를 기반으로 민간이 사용할 수 있는 예금토큰을 발행하는 구조다. 이는 향후 모든 국고보조금 사업으로 확대될 수 있는 ‘프로그래머블 머니(Programmable Money)’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부는 2030년까지 국고금 집행의 25%를 디지털화폐로 전환한다는 장기 목표를 제시했다.

업계는 이번 변화가 재정 집행의 효율성을 높일 것으로 기대하면서도, 새로운 시스템 적응에 대한 과제를 안게 됐다. 보조금 수령 기업들은 블록체인 기반의 새로운 정산 시스템에 대비해야 하며, 이는 장기적으로 기업의 재무 투명성 요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이번 전기차 충전 보조금 시범사업의 성공 여부는 향후 국내 공공 재정뿐 아니라 ESG 관련 자금 집행의 표준 모델을 제시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